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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몸에는 수분이 65%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 수분은 모든 대사작용에 없어서는 안 되는 귀중한 성분이다. 이것이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신체 내의 대사작용에 이상이 생긴다. 그래서 곧 갈증을 느끼게 되고 그럴 때 물을 마신다. 그러나 물은 맛이 없으므로 여러 가지 맛을 가미한 음료를 마신다. 커피와 홍차가 그 대표적인 음료이다. 나라마다 고유한 음료가 있지만 커피와 차는 세계적으로 이용되는 음료이다.
오늘날 커피는 인류사회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지구상에서 인간과 커피 중에 어느 쪽이 먼저 출현하였는지에 대하여 확실하게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역사가 길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인간과 커피의 출현장소가 아프리카로 그 위치가 상당히 근접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초의 인류인 호모 사페인스(Homo sapiens)는 중앙아프리카의 동부지역에서 발견되었고,커피 원산지는 북아프리카 에티오피아의 남서부 지방인 카파(Kaffa)로 추정되고 있다. 지금도 에티오피아에서는 야생의 커피나무를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요즘처럼 커피가 기호음료로서 자리잡게 된 것은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림 1] 커피열매를 먹고 흥분되어 염소와 함께 춤을 추고 있는 칼디
커피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들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에티오피아의 고원지대에 사는 칼디라는 목동이 염소에게 풀을 먹이다 깜박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어난 칼디는 염소들이 매우 흥분하여 뛰어다니는 것을 보았다. 이상하게 생각한 그는 주위를 살펴보다가, 나무에 붉은 열매가 달린 것을 발견하였다. 염소들이 흥분한 원인이 그 열매에 있을 것으로 추측한 칼디 자신이 그 열매를 직접 따먹어 보고는 그 또한 흥분되어 염소들과 함께 춤을 추게 되었다. 그 광경을 마침 지나가던 수도승이 목격하여 신기하게 생각하고는 그 열매를 가지고 수도원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수도승은 이 붉은 열매가 혹시 악마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불속에다 던져버렸다. 잠시 후 커피열매가 불에 타면서 향기로운 냄새가 수도원을 감쌌다. 그래서 수도승은 무언가 좋은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에 타다 남은 열매를 갖고서 많은 노력과 연구를 한 결과, 뜨겁고 검은 음료를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이것을 마시면 기도할 때 졸음이 오는 것을 막아줄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을 활기있게 해준다는 것을 알았다. 마침내 커피는 악마의 것이 아니라,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고귀한 선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모하메드가 잠을 쫓을 수 있도록 천사 가브리엘이 천상에서 커피를 가져왔다. 커피를 몇모금 마신 모하메드는 기운을 내어 40명의 남자를 말에서 끌어내리고 40명의 여자를 기쁘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전설들이 있기는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마시고 있는 것과 같은 커피와 개발된 것은 오랜 세월이 지난 뒤였다. 인간은 야생 커피열매의 식용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수많은 실험을 하였다. 기름에 튀겨 보거나 물과 함께 일종의 야채스프를 만들어 보기도 하였다. 또한 씨를 분리하여 분쇄한 다음, 동물기름과 혼합하여 여행할 때 식량으로 사용하기도 아혔다. 오늘날처럼 커피를 음료로 사용하고 있었던 경우는 에티오피아 서남부 지역으로 극히 한정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은 소수 부족의 특수한 풍습에 지나지 않았다. 이처럼 기호음료를 목적으로 한 커피의 본격적인 이용법은 그 뒤로도 기나긴 세월을 필요로 하였다. 커피는 또한 술의 원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열매에 들어 있는 당분을 발효시켜 술을 만들었던 것이다. 또한 아라비아의 의사였던 라세스(서기 850~922년)와 아비세나(서기 980~1037년)의 기록을 보면, 에티오피아산 야생 커피종자를 분쇄하여 물로 추출한 액체를 의약품으로 사용하였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즉 커피에 함유된 카페인의 약리작용을 인식하였다고 볼 수 있다.
커피를 음료로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0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초기에는 커피열매의 씨를 오랫동안 찬물에 담궈 두었다가 추출된 액체를 마셨으나 점차 끓는 물에 넣을 경우 훨씬 추출이 잘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많은 궁리 끝에 커피의 진가를 알아낸 것은 라세스 이후 14세기 말엽에 이르러 아라비아에서 커피 생두를 볶는 기술이 개발되고부터서였다. 화려한 변신의 순간이었다. 뜨겁게 타오르는 불길이 커피를 새로운 맛의 세계로 끌어냈다. 몸과 마음을 맑게 하는 쌉쌀한 맛과 깊은 향취에 모든 사람이 매혹되었다.
이제 커피는 이슬람 제국 및 그들이 정복하였던 지역으로 점차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커피(Coffee)라는 명칭은 에티오피아의 카파(Kaffa : 커피의 원산지 지명)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아랍 어인 Qahwa, 즉 <식물에서 만들어진 포도주, 커피 및 여러 음료를 총칭하는 말>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실제로 17세기 초 유럽에 소개된 커피는 <아라비아의 포도주>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그림 2] 17세기 한 터키 인이 커피를 마시고 있는 모습. 아라비아의 전통적인 이브리크(ibriq) 커피포트를 무릎 옆에 두고서 비교적 큰잔에 커피를 마시고 있다.
유럽보다는 동방에서 먼저 커피문화가 형성되었다. 1554년 현재의 이스탄불인 콘스탄티노플에서 문을 연 커피점은 너무나 번창하였기 때문에 몇년이 지나지 않아 이곳에 많은 커피점이 세워졌다. 지식인들이 많이 드나들었기 때문에 <지혜로운 곳>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그 당시의 커피점에 많은 사람들은 음악을 듣거나 체스를 하기 위해서 모여들었고, 그곳은 토론장소로도 이용되었다. 외국인들과 친해지기 위해서 오는 사람도 많았다. 콘스탄티노플의 커피점은 유럽 카페문화의 모체가 되었다. 그러나 이슬람 제국의 커피점이 언제나 번창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정치적 모임을 두려워한 군주에 의하여 세 번이나 완전히 폐쇄된 적도 있었지만 대다수 국민의 반대에 부닥쳐 오래지나지않아 다시 문을 열었다.
[그림 4] 19세기 초 아랍의 전형적인 커피점. 중앙에 분수가 있는, 당시의 멋진 사교장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유럽에 커피점이 출현한 것은 그보다 상당한 세월이 지난 다음이었다. 유럽에서는 커피가 초기에는 이교도들의 음료라고하여 거부되었으나, 교황 클레멘트 8세가 이교도만 즐기기에는 너무 훌륭한 음료라고 하여 커피에 세례를 줌으로써 기독교인들도 마실 수 있는 음료로 만들었다.
유럽 최초의 커피점은 베니스에 개점되었다. 초기에는 콘스탄티노플의 커피점을 모방하였다. 중산층을 주요 고객으로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곧 방향을 바꾸어 상류층을 대상으로 하자 베니스의 커피점은 날로 번창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가 1645년이었다. 비엔나의 커피점은 1687년 군인이었던 게오르크 콜시츠키(Georg Kolschitsky)가 처음 나들었다. 그는 비엔나를 점령하고 있던 터키를 물리친 공적을 인정받아 터키가 후퇴하면서 감겨놓고 간 커피 500포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아랍 풍습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커피를 볶는 법과 추출방법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커피를 제공할 때 터키를 물리친 기념으로 이슬람 제국의 상징인 초승달 모양의 케이크를 만들어 손님에게 접대하였다. 이와 같은 것이 관습이 되어 오늘날에도 중부 유럽에서는 커피와 함께 케이크 또는 달콤하게 가공된 고기를 함께 곁들여 먹기도 한다.
한편 지중해의 상권을 독점하고 있던 베니스의 상인들은 동방의 향신료 무역으로 새롭게 등장한 포르투칼ㆍ영국 및 네덜란드 등의 상인들에게 그들의 영역을 점차로 잠식당하고 있었다. 잃어버린 상권을 되찾기 위하여 베니스 상인들은 커피를 독점 생산하고 있던 아랍 인들과 손을 잡고 커피무역을 시작하였다. 아라비아의 모카항에서 선적된 커피는 베니스항에 내려지고 이곳에서 유럽의 모든 지역으로 공급되었다. 18세기 초반까지 약 100년 동안 베니스는 커피무역을 독점하고 있었다. 이 때까지 아랍 인들은 커피를 독점생산하기 위하여 외국인에게 커피를 판매하기 전에 커피 씨앗을 볶아버리거나 삶아 싹이 틀 수 없게 하였다. 이처럼 커피가 아랍 세계를 벗어나는 것을 철저히 막았으나 17세기 초 인도의 바바 부단(Baba Budan)이라는 한 순례자에 의하여 아랍의 커피 독점은 깨지고 말았다. 그는 1616년 아랍에서 훔쳐낸 7개의 커피 씨앗을 인도로 가져가 마이소아 지방에서 재배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정작 대규모로 커피를 재배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네덜란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1690년 암스테르담 온실에서 재배에 성공한 커피묘목을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동인도에 보냈으며, 그리하여 1699년에는 자바와 수마트라에서도 재배되기 시작하였는데, 커피는 이 지역의 기후에 잘 적응하였다. 수년이 지나자 네덜란드 식민지는 커피 주생산지가 되었고 동인도 회사와 암스테르담은 커피무역의 중심지로 등장하였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커피 가격을 조정하기 위해서라면 과잉 생산된 커피를 과감하게 폐기처분까지 하였다.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기호음료로 차를 주로 마시고 있었는데 자국내 식민지에서 쉽게 커피를 구할 수 있게 된 후부터 커피 소비국이 되었다.
차와 커피 어느 편이 더 나은가에 대하여 논쟁이 끊이지 않자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3세 자신은 커피만을 마시면서 궁중의사에게는 차만을 마시게 하였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의사가 83살까지 장수를 하였고 왕 또한 의사와 같은 나이에 죽었다. 물론 현대 의학실험과는 성격이 다르지만 당시의 유럽 사회에 커피를 보급시키게 된 재미있는 실험이라 하겠다.
베니스에서와 달리 네덜란드의 커피점은 번성하지 못하고사람들은 주로 가정에서 키피를 마셨다. 북유럽의 차가운 날씨 때문에 밖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덜란드는 식민지에서 많은 양의 커피를 생산하였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상술을 지니고 있어 다른 국가와의 경쟁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커피를 독점하려고 하지 않았다. 1714년 암스테르담 시장은 프랑스 왕 루이 14세에게 커피나무 한 그루를 선물하였다. 프랑스 왕실은 이미 커피에 매료되어 있었다. 커피에 설탕을 타 마시는 습관도 바로 이때 와실의 여자들에게 시롯된 것인데 설탕 대신 꿀을 섞기도 하였다. 베르사이유 궁전 온실에서 자란 커피나무는 새로운 운명을 맞게 되었다. 즉 프랑스 식민지 마르티니크(Martimique) 섬에 근무하던 끌류(Gabriel De Clieu) 대위가 조국을 방문하였다가 임지로 다시 떠나면서 묘목 몇그루를 갖고 가기를 원하였다. 되돌아가는 길은 험난하였다. 해적을 만나기도 했고 폭풍우 때문에 거의 죽을 뻔하기도 하였다. 항해 도중 물이 떨어지자 끌류 대위는 자신에게 할당받은 식수마저도 커피 묘목을 살리기 위하여 나무에 주었다. 아메리카 대륙의 프랑스 식민지에 간신히 도착하였을 때 어린 묘목은 모두 죽고 단 한 그루만을 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한그루는 마르티니크 섬에서 무성하게 선식하기 시작하여 1777년 천팔백만 그루가 되었다. 이곳의 커피는 그 후 프랑스령 기아나(Guiana)로 옮겨져 울창하게 번성하였다. 그래서 이 한그루의 묘목을 기념하기 위하여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 이름에서 인용하여 이 지역에서 재배되는 커피를 부르봉 커피라고 부르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유럽의 다른 국가들도 자국의 식민지에 커피농장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스페인은 서인도 제도에, 영국은 1730년 자메이카와 1740년 인도에 대규모 커피농장을 만들었다.
세계 최대의 커피 생산국인 남미의 브라질에 커피가 전해진 것은 1727년 사랑에 빠진 프랑스령 기아나 총독 부인이 포르투갈 연인과 헤어질 때 그에게 보낸 꽃다발 속에 커피나무를 숨겨 선물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그러한 이야기의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아무튼 브라질은 그 토양과 기후가 커피 재배에 너무나도 적합하여 곧 세계에서 첫번째가는 커피 생산국가가 되었다.
북미 대륙에 커피가 소개된 것은 끌류 대위의 커피나무가 마르티니크 섬에 도착하기 전이었다. 영국에 정복되어 오늘날 뉴욕으로 불리우고 있는 당시의 뉴암스테르담에 1660년 커피가 등장하였다. 당시 북미의 영국인 가운데 부유층은 커피를 즐기고 있었으며 중산층은 주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1773년 영국의 조지 국왕은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수출되고 있던 차에 세금을 지나치게 부과하였다. 이에 반발한 시미들은 보스턴 항구에 정박중이던 영국 상선에 한밤중에 올라가 그 배에 실려있던 차를 대서양에 모두 던져버렸다. 이것이 미국 독립전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보스턴 차당 사건>이다. 그후 미국에서는 차를 대신하여 커피가 기호음료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웃 일본의 경우, 커피 묘목이 소개된 것은 1878년이었고, 1888년에는 동경 우에노에 첫 커피점이 생겼다. 한편 우리 나라에 커피가 소개된 것은 이른바 아관파천 무렵 러시아 공사관에서 고종황제가 마신 것이 처음으로 여겨지며 이때가 1895년경이다. 그 후 독일의 손탁이라는 여인이 중구 정동에 커피점을 차린 것을 효시로 보고 있다. 개화기와 일제시대에는 서울의 명동과 충무로, 소공동, 종로 등에 커피점들이 자리잡기 시작하였으며 6ㆍ25전쟁을 거치면서 미군부대에서 주로 공급되던 원두커피 및 인스턴트 커피가 계기가 되어 커피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다. 우리 나라에서의 인스턴트 커피 생산은 1970년 동서식품에서 시작하였으며 미주산업과 그 후신인 미원음료, 그리고 한국 네슬레에서 커피를 생산 판매하고 있다. 한편 소득의 증가와 함께 보다 다양한 커피를 요구하느 소비자의 욕구에 맞추어 쟈뎅에서 1988년 국내 처음으로 원두커피 전문점을 개점하였다. 셀스서비스와 깨끗하고 밝은 분위기 그리고 향기로운 커피내음은 젊은이들의 많은 호응을 얻어 오늘날 번성하고 있다.
상기 본문은 아래의 책에서 발췌하였으며 본문의 저작권은 아래에 기술한 원문이 수록된 책의 저작권자에게 귀속됩니다.
이 책은 제가 커피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후 처음으로 구매한 2권의 책 중의 한 권이기도 합니다. 제목: 커피 부제: The book of coffee 지은이: 윤영노/황성연 펴낸이: 김성식 펴낸곳: 도서출판 윤문 초판 인쇄일: 1993년 12월 20일 ISBN: 89-7274-003-9 |
(본 포스팅은 예전에 다른 블로그에 썼던 글을 옮겨온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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